루터와 칼뱅, 그리고 예수?
루터와 칼뱅?
개신교에서 기념비적인 존재들이다.
왕왕이 이 두 분의 신앙가르침에 대한 비교 분석이 화두로 떠 오르는 데, 그 이유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가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 바로 칭의라고 부르고, 성화란 의롭다 부름 받은 우리가, 칭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도리, 즉 거룩한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 하겠다.
루터는 구약에 기술 된 것처럼, 바리새인적 거짓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하면서, 종교개혁의 씨를 뿌린 개신교의 개척자였다. 반면에 동시대에 루터 보다 수십년 후에 등장한 칼뱅은, 비록 우리가 의롭다는 칭의를 받은 존재이지만, 칭의란 시작점에 불과 한 것이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칭의로 인해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삶 속에 그리스도 예수와 닮은 삶을 살도록, 성화에 대한 요구를 중점적으로 강조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칭의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하신 우리를 향한 강권적으로 나린 선물이지만, 성화는 비록 성령의 인도함 속에 온전히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성도의 관점에서 실천하도록 요구 되는 후속 되는 조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마도 “칭의만 있고 성화가 없는 구원은 없다”라는 전통 칼비니즘의 주장에 반해서, 요즘 교계를 떠들석하게 하는 소위 구원파들이 주장하는 비칼비니즘적인 주장,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에 대한 반발로 행위적 성화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의 성화에 대한 주장이 바리새인 적인 행위적 독단의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버릴 수가 없다. 거룩한 생활 실천에 대한 인간적인 의지나, 노력이 많은 경우, 교만이나, 우월감으로 나타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칼뱅의 이러한 교리의 주장으로 해서 현대에 와서는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서, 교단 위주의 종교행위로 변질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서, 현대 교회가 인간적으로 타락한 동기를 제공한 꼴이 된 거지요.
왜, 신앙에 예수는 어데로 간지 흔적도 없고, 대신에 루터가 강조 되고, 칼뱅이 지금까지 이름을 떨치면서, 조직이 생기고 추종자가 따르는지? 조차에 대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 면이 있다는 점을 짚어 보고자 한다.
비단 칭의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언이 아니라, 성화 조차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간섭 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구원파들에 인한 성화 자체를 백안시하는 편파적인 종교적 주장은 그야말로 웃기는 것이고, 성화의 근본 의미를 왜곡 되게 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성화란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화야말로 신앙인들의 근본 삶의 모습이다. 그 외에 신앙인들이 무엇을 더 논쟁하고, 또 구별하기를 원하는가?
루터와 칼뱅, 그리고 예수가 아니라, 그리고 칭의와 성화를 열심히 구별하기 이전에, ‘오직 예수’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