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 칭의와 성화 이야기!
오늘 아침에는 루터교의 창시자인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에 대한 비교론을 읽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강조한 대가 답게, 하나님의 은혜인 칭의에 중심을 두었고, 칼빈은 칭의를 통한 성화에 중심을 두고, 교리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댓글을 아래와 같이 올려 보았다: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칭의와 성화?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 연합된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이라는 생각을 새 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내리신 의에 대한 은혜의 선물이고, 성화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점진적으로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하나님을 믿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단번에 완성 된 일이기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단지 믿음으로 아멘해야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화는 평생을 두고, 성령과의 교통하심을 통해 인간이 이루어야할 평생 과제이기에 인간에 관점을 두고 교화를 강조해야 하는 면을 고려해야겠지요.
단순히 시제를 통해서 이를 살펴 보면, 칭의는 완료형이지만, 성화는 현제 진행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도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칭의를 통한 성화의 순차적인 이룸에 대해서 당시 천주교 신부로서,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에 의해서 강조되어야하는 성화 부분에 대한 회의를 가졌기에, 인간의 조건인 성화 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칭의에 대한 믿음을 더 가진 것 아닌가 생각이 들고, 반면에 법학도 였던 칼빈은 청빈사상에 입각해서, 하나님 보다는 인간의 선한 실천사상을 강조해서 인간 공동집단의 이상향을 이루고자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루터는 인간들의 위선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무게가 실린 것이고, 칼빈은 하나님 은혜를 바탕으로한 인간 개조를 통한 평생의 열매인 삶 속에 성화를 이루어가는 쪽으로 무게를 잡은 것 같네요.
동시에 루터와 루터 이후의 칼빈이 속한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루터는 홀로 천주교라는 거대 조직을 상대로 해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은혜만을 다루어야 했고, 칼빈은 루터 보다는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동조를 받는 시대상황으로 인해서, 오직 교리를 통한 천주교를 대항하기 보다는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서, 대중들의 교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하는 시도한 측면이 있었지 않았는가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각각, 15C 말~16C 중, 16C 초~16C 중엽으로서 동시대에 활동한 사람들이고, 같이 법학을 전공하고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루터는 칼빈에 20~30년 앞서서, 종교 개혁을 시작한 분이었고, 칼빈은 그래도 루터 이후에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가 된 이후였기에, 칼빈은 루터 보다 대중화를 위한 토대가 더 공고히 다져진 면이 있었지요.
그래서 루터의 개혁은 대중을 효과적으로 교화 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인 라틴어 성경을 독일 말로 번역하는 일에 치중을 했고, 칼빈은 성경 교사로 일하면서 대중에게 직접 다가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된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게 중심을 둔 루터와, 하나님에서부터 인간들에게 중심축이 이동 된 칼빈의 주장에서, 이는 교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으로인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두 분의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