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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도는 좌(左)로도 우(右)로도 치우치지 말라”고 했는가?에 대한 아름다운 대화(III)!

“진리는 하나이지 둘 셋이 아닙니다.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인양 위선으로 포장된 것들이 양들을 미혹하며

좌우에 함정과 올무를 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無名人 –

진리(眞理)는 분명히 하나이지요.

문제는 하나가 전부(全部, All or Nothing)인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전부는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이거다 저거다 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하나라는 의미나 이거다 저거다 하는 의미는 엄밀하게는 틀린 것이 아니라 동일(同一)하다는 겁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인간의 관점으로는 절대로 진리를 판단할 수 없고, 하나님 관점으로서만 진리에 대한 의미와 그 해답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속 좁은 눈으로는 도저히 한계를 넘어갈 수 없는, 아득한 세계이기 때문에 진리란 접근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모르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소위 지혜로운 처신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아무 것도 모르니, 건방지게 안다고 깝죽대지 말라”는 겁니다.

즉 교만(驕慢)하지 말라는 것이고, 모르는 존재이니 만큼, “우리는 좌로도 또 우로도 할 수 없이 치우쳐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자복하고 거꾸러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인정할 때에 겸손하게 진리 위에 서신 창조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숙달할 수 있고, 이로서 바른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주(創造主)와 피조물(被造物)의 바른 역할과 관계를 가지고 회복될 때에 구별되는 거룩함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거지요. ♡ 안응 곽계달 ♡

“진리가 이거다 저거다? 어느 것이 진리 입니까?

이것도 같고 저것도 같다? 그러면 진리가 셋이 되는 것이네요?

판단의 기준은 말씀에 있습니다.

진리란 접근 할 수 없는 존재? 그럼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믿는 다고 합니까? 갈팡질팡 신앙은 신앙이 아니지요.

우리 하나님을 믿으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으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 아닙니까?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십시오!“ – 無名人 –

ㅎㅎㅎ 옳은 말씀입니다. 진리는 하나이지요.

하나의 진리라는 말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분별조차도 못하는 좌와 우에 치우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다, 즉 의롭다고 칭의(稱義) 하신거지요.

우리는 원래 죄의 자손인지라, 의롭지 않지만, 그래서 치우치지 않을 수 없지만, 단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치우치지 않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은 볼 폼도 없었지만, 구별하여 하나님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또 그를 통해 예수라는 진리를 낳게 하셨지요.

진리는 하나지만, 우리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로 진리에 속할 수 없다는 겸손한 깨달음과 자백만이 우리를 구원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온전히 만난다는 요지입니다.

♡ 안응 곽계달 ♡

“예수님의 구속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시군요.” – 無名人 –

열심히 댓글을 달았는데 지어져 버렸네요.

아마 하나님 뜻인가 봅니다.

내용인 즉슨, 본문의 제목과 내용을 조금만 시간을 내어 관심을 두시면, 동문서답을 피할 수 있다는 내용이랍니다. 그리고 적어도 신앙인은 남을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답니다.

적어도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의 구속이 무엇인지? 정도는 고민하면서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본자세란 것을 깨달아야겠지요.

신앙인은 남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부인을 통해 성숙하는 겁니다.

남의 십자가에 관심 두시기 전에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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