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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대화, 인간의 한계에서 진리로 넘어가기!

오래 전에 어느 페친님의 설교 문에 대한 댓글을 통해서

“진리와 신앙인의 자세”를 주제로 한 좋은 대화가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공유해 봅니다.

아마도 인간 세상의 시공간의 제약성과 역사성으로 인한 인간의 한계를 통해서,

어떻게 진리인 영원의 세계, 하늘 세계를 다가가고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단편적인 이견에 대한 유익한 토론이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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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 -2014.05.30-

우리가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흔히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유독 마태복음에서만 [천국]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의미는 타 복음서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적 개념을 그분에게 적용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라는 단어는 대부분 ‘장소적 개념’보다는 ‘통치’와 ‘다스림’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다윗의 나’라는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주권’ 혹은 ‘통치’ 또는 ‘다스림’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말하면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청한다. 그들은 자신의 전인격을 돌이켜서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나아가야만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스림’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소적인 개념은 지금 이 곳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영혼과 마음에 임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요한은 회개를 요청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만의 주권을 사용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서 신성모독을 행했다며 분개했다. 하나님의 구원 다시 말해서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중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에 비견하신 일이 있으신데, 밭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다. 여기서 천국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천국은 지금 우리의 곁에 있고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지금 이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본다. 하나는 [계시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분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인데 따라서 천국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신 그의 아들을 육체로 보내셔서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말씀이 되게 하시고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있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믿음으로서 우리에게 실존이 된다.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그리스도는 ‘거룩’이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고 그것을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영역이다.

둘째는 [예배의 영역]이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그 분에게 마땅한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된다. 우리가 매 주일에 공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데, 왕이 그 백성 가운데 오실 때 그의 백성들은 왕께 영광을 올려 화답한다. 왕의 통치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서 우리는 회개, 감사, 기쁨의 찬송, 헌상, 믿음의 고백 등을 왕께 올려 드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나라의 임재의 현장이다. 이러한 예배는 백성들의 삶에서도 지속된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순종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헌상하는 십자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은 [심판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이신데 그 가운데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이러한 구원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이 죽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의 부여를 의미한다. 이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림 곧 보호하심과 도우심과 신원하심이 함께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는 역전이 발생한다.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며 갇혔던 자들이 자유하게 되고 슬픔이 기쁨 되고 고통이 평화가 된다. 예수님은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하고 묻는 요한에게 이러한 말씀으로 답하셨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베푼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속 우리의 삶에 임하고 계신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그 자체이다. 오늘도 우리의 사소한 일상 중에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소망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p/s 이번 주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설교를 할까 하는데, 떠오르는 단상을 짧게 정리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갑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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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 말씀입니다.

한 가지, 임하심이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로 하셨는데, 예배 때 왕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는 자칫 왜곡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노파심을 가져 봅니다.

이미 함께 다스림을 받고 있음으로 그냥 하나로 됨을 안식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다른 곳에서 장소로의 임한다는 의미로 자칫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임재로 동거하는 것을 누리는 것 자체가 훌륭한 예배이지, 모여서 임재를 사모하고 찬양하는 것은 장소를 떠나서 자칫 형식으로 빠지는 대오를 범할 수가 있지요.

관계 속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교회이며, 또한 최고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 안응 곽계달 @

“예배 시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하신다는 것이 그 장소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식으로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위험성이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구약에 보면 성전에서 예배할 때 주로 시편을 많이 읽었는데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인데요. 예배를 수평적으로만 보면 말씀이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예배는 수직적인 개념이 보다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모든 대화에 귀를 기울이시지만 특별히 따로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그 때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시공간에 제약을 받다 보니까 예배 시에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 위하여 임재하신다고 하면 장소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든 예배 때마다 새로 오심입니다. 그 분은 예배 가운데서 자신의 구속을 보여주시고 또 왕적 통치를 행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해서 말씀 드리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 모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모여 드리는 예배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아니라 예배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삶의 예배를 함께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함께 모여 기뻐하는 것이 예배라고 한다면 사실상 예배는 아무런 순서가 필요하지 않지요. 아마 예배론에 있어 저와 차이가 있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아무튼 말씀해 주신 내용은 충분히 생각해서 전혀 오해가 없도록 잘 설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갑진님 –

(좋은 것을 지적해 주셨네요.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제약이 없다는 의미는 또한 형식, 엄밀히 이야기 하면 예배의 순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순서가 있었다면 자유케 하시는 진리의 영으로 오신 예수님 이전의 구약의 절기나 제사를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형식은 신약의 예수님과 함께 모두가 완성 되어서 더 이상 구약의 그림자를 따를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예배에는 순서는 없습니다.) @ 안응 곽계달 @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저와 예배론이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그럼 주일에 모여서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리시는지요? 혹시 유기적 교회에 속해 계시는 것인지요?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따지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보니 대화가 겉돌 수 있을 것 같아서 실례가 안 되면 좋겠습니다. ^^

예배는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시공간에 제약을 받는 인간 사이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의 관계성을 잘 확인하고 또 인간의 한계성도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들의 세계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무위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식과 한계성 안에서 예배를 받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부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를 온전하게 하나님이시죠. 우리가 만일 드러누운 자세에서 예배를 한다든지 잠옷을 입은 채로 슬리퍼를 신고 예배에 온다던지 하는 일이 전혀 상관이 없지만 동시에 상관이 있습니다.“

만약에 양가 상견례를 하는데, 사돈 되실 분이 집에서 입는 평이한 복장으로 슬리퍼를 신고 왔다면, 사돈의 마음이 이 결혼을 별로 원치 않는구나, 성의가 없구나 우리가 그 중심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영은 받으시고 육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예배가 있습니다. 근데 꼭 10분씩 늦게 들어오고 한 5분씩 빨리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형식과 질서를 통해서 예배를 가꾸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중심을 모아 예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초대교회에도 어떠한 순서가 있었습니다. 회당의 예배가 초대교회의 예배순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지만 동시에 중요합니다. 예전은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합당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 최갑진님 –

(지금도 귀에 선하게 들려오는 판에 박힌 말씀이 있지요. 대통령 만나러 가는 데에도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예배 보러 가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교회 권위와 질서’라는 용어이지요.

제가 평생을 속아온 너무나 세상 적이고 인간적인 가르침이었지요.) @ 안응 곽계달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 주변에도 예배의 순서나 제도들을 가능한 무시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 그 분들의 이론은 익히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한계성 역시,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 라는 관점에서 예배에 마땅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 – 최갑진님 –

(진리는 복장이나 형식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정성이나 마음가짐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소위 말하는 구약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지요.

진리는 인간적인 모습이 주는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진리는 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형식과 행위를 능가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 안응 곽계달 @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 – 최갑진님 –

(깨달음의 위대함이 빈정 받으면 안 되겠지요.) @ 안응 곽계달 @

“빈정이라는 것은 빈정대다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사실 조금 바쁘지만, 최대한 성의를 다해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고 여러 번 질문을 드렸는데, 깨달음에 대해서 말씀하셔서 깨닫기만 하면 그럼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가 여쭈어 본 것입니다. 전제에 차이가 많으면 사실 논쟁이 소모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 이해를 조금 요구한 것인데요. 아무튼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깨달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 최갑진님 –

(이해 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안응 곽계달 @

“최갑진님 말이 맞다에 한표” – 강하림님 –

“감사합니다. ^^“ – 최갑진님 –

“다시 생각해보니 Kae Dal Kwack님의 말이 틀렸다기보다는 과부의 두렙돈을 칭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히 여기신다는 점을 우리가 놓치면 안될것같아요.” – 강하림님 –

“네. 맞는 말씀입니다.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참석했다고 해서 예배를 드린 것이겠습니까.”

– 최갑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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