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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 일탈에 관해서!

일상의 지루한 고정된 틀을 깨고 새로움으로의 도약을 변화와 도전과 일탈 행위라 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를 두고 혁명적 변혁 내지는 혁신이라고도 한다.

이천 년 전 예수의 등장은 당시 구약이라는 관습과 전통과 규범이라는 일상에 젖어 살아 온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선한 천지개벽의 혁신적 존재로 비춰졌을 것이고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소위, 일상의 수호자였던 바리세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의 대명사였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뫘다”는 예수의 공개적인 선포는 일상에 젖어 살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천둥과 태풍의 눈이 아닐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윗 왕의 전성시대, 당시 다윗 왕은 지루한 한 밤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높은 궁전 성곽 아래를 살피던 중 충신이었던 우레아 장수의 부인이었던 밧세바의 아름다운 자태를 훔치게 되었고 결국은 불륜과 함께 신하를 죽이는 살인까지 서슴치 않게되었다. 불륜과 살인을 저지런 다윗의 배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을 단순히 한 인간의 절제되지 않은 탐욕과 교만을 그 주요 원인으로 들 수도 있겠지만 해석을 달리해서, 이것을 일상에 대한 혁신적 일탈의 의미, 즉 기존의 도덕과 예의와 양심에 대해 도발하기 위한 혁신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그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한다.

성경에서 다윗 왕을 예수의 예표라고도 하는 이유는 그의 선하고 충성되고 온유한 공통적인 성격도 있었겠지만 선과 악으로 구별하기 전에 이러한 혁신적 일탈의 면으로 서로 간의 공통점을 부여해야 할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의 관계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극, 이것은 그야말로 일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결코 아니다. 특히 하니님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왕에 있어서는 더구나 일어날 수 없는 일상이 아니지 않았겠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가 저지넌 일탈의 원인에 대해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그가 진정으로 밧세바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그가 살인까지 하면서까지 그녀를 취했을까? 진정한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넘어서는 힘과 마력이 있다.

당시, 다윗과 밧세바는 한 남자와 여자로서 세상 어떤 것도 넘어서는 사랑의 마법에 빠져든 것이다. 근본 에로스 사랑은 두 사람의 진정성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그 진성성으로 인해 에로스 사랑은 신과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승화되기 마련이다.

이렇듯 진정한 에로스 사랑은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서로 일맥상통하는 관계라하겠다. 불륜과 살인은 단지 일상의 상식의 틀을 깨는, 이들 두 남녀 간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깊은 사랑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사랑을 통달하는 진정한 사랑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성경적 의미에 다달아야 한다. 다윗과 밧세바의 어마어마한 사건을 단지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이해하려 한다면 당연히 십계를 범한 범법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당연했지만 오히려 그는 솔로몬이라는 지혜로운 자손으로 대를 이어, 결국은 다윗의 자손 예수를 낳게 되는 하나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는 일상을 깨는 혁신적 일탈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한다.

근본 하나님이었던 예수가 이 땅에 육으로 오신 것이나, 한 점 죄 없었던 선한 예수가 세상에서 죄인 중에 괴수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도 그야말로 일상에서는 도무지 일어나서도 또한 인간적 상식으로서는 설명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대표적인 혁신적 일탈의 좋은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다윗은 왕으로서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일상의 세상 왕의 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탈을 한 하늘 왕의 면모였다.

세상 왕으로 볼 때는 그의 벗어나는 행위는 곧 탐욕과 교만으로 비취지기 마련이었지만 하늘 왕의 일탈의 측면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교만과 탐욕인 에로스를 반면교사로한 하나님 아가페 사랑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 해야하겠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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