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지혜를 가르친다!
너무 좋은 글이네.
가슴을 치고 대의를 보게 하는 큰 글이로다.
“자동차 길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5,360m의 타그랑고개. 구름마저도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곳.
지상의 거인 히말라야의 가혹한 자연과 이천 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 어쩌면 그 덕에 어느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전통을 배우고 이어왔는지 모른다. 죽음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까닭은 단 하나,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에 죽기에 원망할 것도 두려울 하등의 이유도 없다. 결혼했기에 이혼해야하고 만났기에 헤어져야 한다는 평범한 철학이 우리를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일상이 일탈이고 또 일탈이 일상으로 만나는 그 지점이 오직 생존을 담보로 해서 만나는 온전한 지혜가 존재하는 그곳이리라.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위대한 철학인 셈이다. 신도 자연도 서로 같은 맥락으로 다가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존과 죽음 앞에 서서 배우는 지혜, 거룩한 신성 앞에 서서 배우는 겸손의 지혜와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신을 만나고 싶은가? 신을 논하기 전에 먼저 자연 앞에 겸손히 서서 묻고 배우라. 먼저 생존 앞에 겸손히 마주하고 자신에게 묻고 배우라.
“죽음, 늙고 병든 몸에서 벗어나 스스로 평온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고 일상의 수행이 일러준 혼자만의 긴 여정이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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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삶을 가르치다)
티베트 명상법에 관한 책을 보다가
우연히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세상에 이런 제도가 있다니, 호기심에 유튜브 채널을 뒤져 관련자료 몇 개를 찾아보았다.
그 중, 1997년 KBS에서 방영했던 (일처다부제의 전통, 인도 록파족)은 내게 낯선 문화에 대한 생경함을 안겨주었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자동차로 꼬박 나흘을 달려 찾아간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자동차 길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5,360m의 타그랑고개. 지대가 너무 높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갈색의 민둥산이 아득하게 이어졌다.
산소가 적어 보통 사람은 숨쉬기조차 힘든 언덕 너머엔 2,000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록파족이 살고 있다
구름마저도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다.
영하 40도의 맵찬 날씨를 견디도록 집은 돌로 쌓았는데, 록파족은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까지만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반년은 보름에 한 번씩 자그마치 열두 번이나 가축들을 몰고 풀을 찾아 여기저기 떠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그들, 의식주 모두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백여 마리의 양과 염소에 한 가족의 생계가 매달린
그들에게 혼인으로 인한 형제들의 재산 분할이 불가능하자 일처형제혼 등 일처다부제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이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의 특이한 결혼풍습보다는 어느 노인의 죽음 의식과 거기에 깃든 그들의 생사관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3월 말, 봄이 되면 그들은 가축의 방목을 위해 겨울을 보낸 돌집을 나선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보름 남짓 머물면 풀이 바닥나 새로운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남자들은 이삿짐을 싸고 여자는 가는 도중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데 시아버지인 일흔여덟 살의 노인은
성치 못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시무룩하다.
물이 있는 다음 정착지까지는 대략 40에서 80km. 움직임이 더딘 고산지대에서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한다.
하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은 오늘 가족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 이젠 너무 늙어 며칠씩 걷기에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의 순리. 자식들은 노인을 위해 혼자 지낼 텐트와 두툼한 옷을 준비한다. 버터차와 밀가루빵 등 한 달 치 식량을 남겨두고 떠나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노인이 살아 있으면 또 한 달 치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한 달을 넘겨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이 고독한 죽음 의식은 노인과 가족 간의 타협이 아니다. 힘든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고산지대의 오랜 풍습으로 노인 스스로의 결정과 가족들의 수긍이 만든
고립이고 헤어짐이다.
손자에게 마지막 차를 대접받는 노인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아들과 손자는 울음을 삼킨다. 정든 사람과의 이별을 두고 열여덟 살의 손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쉰두 살의 아들도 걸음이 휘청거린다. 새로운 생을 받기 위해 몸을 바꾸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극진한 신앙도 이 순간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긴 인연에 비해 짧은 이별, 노인은 모든 걸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나도 27년 전에 아버지를 이렇게 했다. 자식들을 탓하지 않는다. 행복하기만 빌 뿐이다”라고 노인은 담담히 마니차를 돌리며 허공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절망이 아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걸려 넘어지는 문턱이 아니라, 이번 생과 맞닿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매듭이고 통로다. 늙고 병든 몸에서 벗어나 스스로 평온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고 일상의 수행이 일러준 혼자만의 여행이다. 눈 맑은 그들에겐 저 히말라야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신성한 발걸음인 것이다.
가축들을 앞세우고 멀어져 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은 자리에 눕는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몸을 티베트 말로 ‘루’라고 하는데 이 말은 ‘두고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신에 대한 겸손을 배워왔을 노인, 원망이나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영혼은 몸뚱이를 남겨둔 채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이마 위로 테 굵은 안경이 벗겨지고 손톱 밑이 까만 그의 손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죽음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까닭은 단 하나,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처음 왔던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길, 그 길을 히말라야는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대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그것은 끝이 없다’고 그들의 경전『티베트 사자의 서』는 말하고 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듯이 죽은 자는 무엇으로든 반드시 세상에 다시 온다는 믿음으로 모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사람들, 죽음의 하늘길을 열기 위해 그것과 홀로 마주하는 비감한 모습이 차라리 숭고하다. 이들은 평생 떠남에 익숙하다.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남아있는 부모를 저승으로 보내는 것도 이승의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지상의 거인 히말라야의 가혹한 자연과 이천 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 어쩌면 그 덕에 어느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전통을 배우고 이어왔는지 모른다.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만 삶을 배울 것이다.’ 설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돌풍 한 자락이 하늘의 소리를 전하며 칠흑 같은 벌판을 짐승처럼 내닫는다.”
( 조 헌 /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