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불가합니다!
지난 주말, 테니스 회원 분 중에 한 분이, 느닷없이 종교에 대한 화두를 띄었다.
평소에 두루 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분은, 늘 대화가 새롭고, 모임의 분위기 메이크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분이다. 특히 종교나 영성에 관해서는 필자에게 자주 화두를 즐겨 제기하는 편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생활에 유익한 종교가 그 생명력이 길다고 하더라”고 했다.
필자는 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요.” 분명히 이것은 대화의 기본을 벗어난 무례한 응답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무례한 대답을 즉각 던진 것은 필자의 본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감이 즉시 답을 하게 했던가, 아니면, 원저자의 얇팍한 지식으로 감히 종교의 본질을 왈가 왈부한다는 거부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대응했던 것은 한 편으로는 질문자에 대한 약간의 교훈적인 면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섬찟한 생각도 들었다. 그 분은 늘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라고 할까, 더 심하게 이야기 하면, 판단자의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이었다.
불교면 불교요, 노자면 노자요, 공자면 공자요, 기독교면 기독교요, 하는 그런 부류의 한량한 태도를 보이면서, 기실은 몸은 뒤로 빠져서 방관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그러면서도 최종 결론에 대한 해답은 알고 있다는 식으로 처신을 하고 있으니, 어디 대화 하는 사람, 더군다나 신앙 생활에 폭 빠져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늘 손해 보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의 경우도 이와 그리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대화의 시작이 벌써, 결론을 깔고 있다. “유명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식의 서술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하는 것이 또한 필자의 불만인 게다. 필자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화두를 잡은 사람의 의견을 먼저 파악하고 싶은 것이지만,늘 삼자가 하는 듯, 엉덩이는 이미 빠져 버린 상황을 연출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당신이 신봉하는 유명한 사람의 이론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를 직격탄으로 날린 이유는, 당신이 비록 엉덩이를 뒤로 빼고, 유명 인사를 방파제로 해서 파도를 피할 곳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먼저 갈파하게 한 것이리라.
즉각적인 대답은 이러했다.
생활에 유익했던 종교가 생명력이 긴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했지요. 세상에 합한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문화로 오히려 동화 되어서, 그 생명력이 쉬이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대신에 비록 생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손 치더라도, 생활에 반하는 진리에 입각한 종교는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스스로 유지된다고 했다.
세상에 합하기 위한 종교, 인간의 편리를 위해 곁다리치고 있는 종교는 결국은 차원 낮은 단계로 생명 에너지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역시를 통해서 보면, 인류 최초의 원시 토속 종교를 비롯해서, 수 많은 민속 종교는 지금 어디에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화석으로 남아서 겨우 전통 문화의 이름으로 흔적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신앙은 생활이 아니라, 차원의 눈으로 다가 가야 한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적 백 그라운드를 가졌다 해도, 본인이 처한 낮은 차원의 세계의 눈으로 보고자 한다면, 절대로 높은 차원어 신앙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작은 그릇으로, 신앙의 큰 용량을 담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어찌 세상의 좁은 눈으로 감히 하늘을 논하고 자 하는가? 어찌, 세상 생활의 범주로 진리의 영생의 심오한 뜻을 갈파할 수 있겠는가?
생활이 진리를 추구해야지, 진리가 생활을 따를 수는 없는 거지요.
절대로 불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