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교회에서 만난 두 자매가 있어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이런 저런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한 분은 두 남자 형제 사이에 샌드위치된 자기 삶의 기구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아들을 원했는 데, 딸을 얻은 어머니의 차별화(?)된 구박을 받고 자란 배후를 설명하고, 기구했던 인생살이를 투쟁적으로 극복하고 지금의 자유한 자기 모습에 대해 만족함을 피력했다. 모든 배척한 자신을 주님 만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고, 이후 교회생활에서도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서 좋은 인연을 맺어 주었다는 요지였다.
다른 한 분은 딸이 다섯에 달랑 아들 하나가 있는 가족의 자매였다.
이제 남편과 7년 간 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늘 하시는 말씀이, 이제 그만하면, 성공해서 잘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 반, 투정 반으로 대하신다고 하신다. 그러시고는 늘 자식 많이 생산한 것에 대한 회한이 크시다고 했다.
이런 투정을 들을 때마다, 이제는 변명을 찾기도 지친 딸은 자연히 본의 아닌 댓구를 하게 되고, 언성이 높아지게 된다고 한다. 차라리 남이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아도 될 일들이 흔하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일어나는 것에 대해, 한 편으로는 의아해 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가까울수록 절제판이 준비되지 않은 까닭이라는 생각을 한다.
필자도 왕왕이 경험하는 바에 따르면, 이런 유사한 비생산적인 일들이 가족 만남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될 수 있는 한, 이핑계 저 핑계를 둘러 대면서 만남의 장을 회피하는 못난 지혜를 동원하고 한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가족의 걱정이라는 핑계로 해서, 무지하고 매너도 없는 대화를 함부로 내 뱉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보이지 읺는 우월감으로 갑의 입장을 과시하면서 욱박지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쳐서 살펴 보더라도, 가족 간에 일어난 갈등과 싸움의 치열한 정도는 도를 지나친다 하겠다. 가족들이 만나면 목소리가 다른 만남에 비해서 대개는 어림 잡아, 목소리가 한 옥타브 정도는 더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외없이 한 번은 속 깊숙한 곳에 잠재한 분노를 끌어 올리는 비극이라면 비극적인 결말을 가질 때도 흔히 경험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이며, 현대에 와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재정립 해야 하는 것인가?하는 자문해 본다. 여기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모를 떠나라”는 의미를 새삼스레 가슴에 새기게 된다. 부부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행해야 하는 것이, 옛 사람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구습의 틀을 깨고, 창조의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알을 깨고 생명의 날개 짓을 하는 새와 같이, 새로운 세계로의 비상을 위해서는 자기를 보호하고 구속한 옛 모습의 틀을 타파해야만, 생명의 세계로 발을 디딜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세상에 구속된 모든 것들을 부모라는 상징으로 표현했고, 결국 이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위배되는 존재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인생을 고해라고 표현한다. 여섯 남매를 둔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넋두리가 이를 잘 증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에 와서는 한 명의 자녀 키우는 것도 힘들어 하는 약삭빠른 현대 여인들이 자식생산을 달가와 하지 않아서 출산율이 감소하고, 급기야는 대한민국이 무인도가 될 것이라는 황당한 전망도 하고 있다.
가족의 개념과 패턴이 급속히 바껴지고 있다. 이러다가 머지 않은 장래에 유전자를 이용한 대량 주문형 자식 생산이 현실화 되는 사회가 급히 도래될 것이다. 그러니 오래 사는 것만이 장사가 아닌 것을 직시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