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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떠나는 소명의 화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봐야 한다고 한다. 

좋은 예로 성경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다. 부모에게는 말썽꾸러기였던, 둘째가 부모에게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해서, 타향에 나가서 방탕하게 지내다, 결국은 가진 것 다 탕진한 뒤에, 돼지 우리에서 돼지 죽통을 뒤지다가 부모의 집으로 돌아 오는 스토리다. 

여기서 부모에게 남아서 집을 지킨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극명히 대조가 되는데, 성경에서는 참 부모의 관점에서, 잃어 버렸던  둘째 자식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더 소중한 것은 방탕했던 둘째가 정신 차리고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집에 남았던 첫째가 아니라, 집을 떠났던 둘째 였다는 사실에서도, 밑바닥을 쳐본 인간이 인간성 회복과 더불어 하나님으로 상징되는부모의 진정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집을 떠난 자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가지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선다는 것이다. 현대에 살아 가는 우리에게도 이 교훈이 적용되지 않을까? 

세상이라는 현실 속에서의 우리 육적 부모들이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는 진실 아래에서는, 아마도 부부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영원히 부모를 떠나라”는 성경 말씀이 더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까?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더욱 실감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부모와 일가 친척을 멀리하고 오직 보이지않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부모가 살았던 하란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광야에서 수 많은 역경을 지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따르는 생활을 하게 된다. 만에 하나 아브라함이 부모 친척을 떠나지 않은 가운데에, 인간이 세운 정글 가운데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했을 때에, 과연 하나님을 따르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본보기가 바로 소돔으로  들어 간 아브라함 조카, 롯이 아닌가?

믿음으로 떠나지 않은 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어느 누가 선택 되었더라도 그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 즉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신앙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 믿음이 아니었으면, 또 다른 아브라함이 지명되었을 것이리라. 

세상의 모든 육적 부모와 일가 친척과 형제들은 떠나야 할 대상이고,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이를 진정으로 믿음으로 수행할 때에, 성경의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들의 축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때에 예수님의 부활의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떠나지 않는 자는 온갖 세상의 이해타산이나 죄악의 관계로 인한 무거운 짐에 눌려서, 결국은 질식 사 할 수 밖에 없다. 부모가 그렇고 자식이 그렇고, 아내가 그렇다. 

우리는 진정한 사마리아 인, 선한 이웃인 진리를 찾아서 집을 떠나야 한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레이첼이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레이첼을 떠나지 못한 그였기에 그 결과는 참담하게 막을 내린 이야기도 알고 있다.

우리의 선한 이웃인 사마리아 인은 우리를 구속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 가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와 영생의 구원을 주실 분이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를 대신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집을 떠나, 광야에서만 만날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집을 떠나시는 아브라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선한 이웃으로 영원히 벗하시기 바랍니다.

시위가 당겨진 화살은 떠나야 과녁을 맞힙니다. 

화살은 활을 떠나야 비로소 화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정 중앙의 과녁에 화살이 바로 꽂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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