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신심불이 불이신심 언어도단 비거래금):
믿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믿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믿음은 둘이 아니라는 의미가 과연, 믿음은 하나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믿음이 둘이 아니니, 하나도 아닌 것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믿음을 하나다 둘이다 하는 개념으로,
아니면, 믿음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식으로 성가시게 찾아 다니지 말라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는 문장을 연결해서 해석해보면
더 명확한 의미를 유추할 수 있겠다.
믿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라는 의미는 믿음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언와와 논리와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으로 진리와 같은 변함 없는 절대성과 영원성을 뜻하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믿음이란, 이것이다 저것이다하고 인간이 주장하거나 정의하는 호불호의 대상이나 선과 악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이 믿음의 근본이 진리와 같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감을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음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의 결론을 내려본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믿음(信心)이란, 아마도 인간 본연의 깊은 내면에서 만나는 우주 근본의 이치를 나타내는듯 하다.
“Kae Dal Kwack 교수님은 장로님이신데 말씀의 해석은 부처님같습니다. 옳은 말씀에 많은 이들이 조금 씩 마음의 눈을 뜰 것이라 여겨집니다. 고맙습니다.” -김춘호님-
진리는 여기다 저기다가 아니기에 불교다 기독교다라고 서로 주장하지를 않지요.
누구도 범치 못하는 진리는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오직 진리이외다.
이 우주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믿음도 진리도 함께 하는 자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깨달음의 그 크고 위대함을 누가 부러워하지 않겠소.
믿음과 진리,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인간 지고의 과제이 올시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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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신심불이 불이신심 언어도단 비거래금)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신심불이 불이신심 언어도단 비거래금)”은
“믿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믿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구는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로, 믿음은 둘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며, 믿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시간적인 개념에 구속되지 않으며, 우리의 내면적인 경험과 깨달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믿음의 본질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의 내면적인 성장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송영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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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믿음의 자리!)
1917년 세계 미술계는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발칵 뒤집힙니다. 작품이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였기 때문입니다.
주최 측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전시를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술계는 소변기가 미술품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워졌습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작품으로 인정받은 뒤샹의 작품은 예술의 정의 자체를 바꿔버리며 오늘까지도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 전시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소변기가 화장실에 있으면 소변기가 되지만 미술관에 전시되면 작품이 됩니다.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광풍이 몰아치고 물이 차오르는 갈릴리 호수 가운데 배 안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믿음의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믿음의 자리입니다.
근심의 자리가 아닙니다. 걱정의 자리가 아닙니다. 염려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자리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서 계십니까.”(이장균)(김상오님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