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종류, ‘Belief’, ‘Faith’, ‘Trust’!
[사도 바울에게도 그리스도의 언약에 대한 성실과 순종이 없는 단순히 지적 동의함으로만 받을 구원이란 없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에서 믿음을 단계적으로 구분하며 설명해도 결국 구약의 에무나와 전혀 다르지 않게 믿음을 통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 전통 신학에서는 사도바울의 구원론을 언급하라면 “이신칭의” 교리를 말했다. 그럼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서신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할까? 실제로 “의”를 획득하는 수단이 오로지 “믿음”이라는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 서신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강한 대립을
보이는 상황에서 쓰여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이외 다른 서신에서는 거의 전무하다.
이신칭의 사상은 신구약에서 이 두 서신을 제외한다면 정말 드물게 나타난다(예를 들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한 비유).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신실함과 순종(구약의 에무나)의 행위 없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의 믿음을 최종적인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갈라디아서에서 신실함과 순종(구약의 에무나)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구조는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a),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게 되면(5:16b-17),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다(5:21b).
바울에게도 구원받을 믿음(피스티스)은 구약의 믿음(에무나, 신실함, 순종)과 결국 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 “(갈 5:6). 여기서 우리말로 “역사 하는” 으로 번역된 “에네르구메네”는 행동하는, 혹은 작용하는 뜻이다. 즉 사랑으로 행위하는 믿음 (but faith working through love, ASV)이 아니고서는 구원이 약속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Min Kyu Lee님-
영어로 되는 믿음의 종류는 ‘Belief’, ‘Fait’h, ‘Trust’ 로 나타나는데, 이는 신실, 신용, 성실, 충성 등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해석이 됩니다.
이는 바울이 신약에서 허세적이며 과시적인 바리세인들의 거짓행위를 경고하기 위해 강조된 믿음의 일면도 있었지만 기실은 야고보서에서 강조한 구약의 신실한 순종을 전제로 한 모든 행위를 하도록 믿는 믿음에 대한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는 바리세인들이 내세우는 기만적인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야고보의 행위 없는 믿음과 분별하지 않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보다는 여전히 율법의 형식과 전통에 메여 목회자들의 잘못된 선동과 이에 추종하는 지도자와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의 타락이 가속화 된 점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처했던 그의 인생 여정을 살펴 보건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미 바리세인들의 행위적 믿음으로 인해 철저하게 실패했던 경험(스데반의 순교)이 있었기에, 분명한 믿음의 진실을 주장할 수 있는 거지요.
또 다른 측면으로, 신약의 믿음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대할 때 가질 수 진정성은 행위로 나타내면서 믿는 믿음이 아닌 순전한 믿음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신실하고 순종하는 마음의 표현은 모두가 행위가 아닌, 믿음을 믿는 결단의 행위만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대상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따르기로 결정하고 순종하는 행위 자체가 겉으로 나타나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믿음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설교하는 바울의 결연한 음성을 듣고 싶은 오늘 하루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신약에서의 믿음에 대한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이후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는 성령의 열매로써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성령의 열매라고 딱히 성경에서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적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도 받은 공(功)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시는 우리들의 보혜사(保惠師: Helper)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이해시키고 인도하고 결정하게 하시는 우리들의 주(主)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응 곽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