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의 실체!
[우리는 태양이 폭발하면, 5분 뒤에나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오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태양의 현재는 보지 못하고, 5분 전의 과거라는 태양의 허상만을 보는 것이다.
밤하늘의 많은 별들도 이와 같다. 오늘 목도되는 별 빛은 사실 수백만 년
전의 잔상일 뿐이다. 모든 별들이 서로 다른 과거에서 손짓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우주인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방안의
사물도 우주와 다르지 않다. 모든 곳에는 거리가 존재하며, 그것은 우리에게서
현재인식을 박탈한다. 결국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과거의 잔상,
즉 허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그렇게 허위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자각하는 나 또한 존재의 판단근거를 확보할 수 없는
불투명하게 흔들리는 미지일 뿐이다.] -자현스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도 나를 만지고 확인하고 있답니다.
빛으로 보는 나의 눈이 비록 허상으로 나를 속일지라도 지금 나는
실상인 나를 잡고 있지요. 그래서 사랑하면 실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심으로 서로 껴안고 싶어 하는 가봅니다. 사랑의 행위는
존재의 확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지요!
주제가 빗나간 것은 아닌지요?
[최선을 다해서 사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현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최소단위가 아닌지요?]
-정봉경님-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인가 하는 진실입니다. 때가 늦기 전에 고민해야할 아름다운
여정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실 것인가요?
은혜위에 있는 은혜, 복 중에 있는 복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두 번 긍정은 부정이 아니라, 진짜 긍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의 근본 속성을 말하신 겁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에게 허락 된다면 이것이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라는 것쯤은 이해하시겠지요. 부활이 없는 삶은 잠시의 삶이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어지는 것이지요.
영생의 언약이 전제되지 않는 모든 것이 허사요 헛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란 참 진리를 추구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며 이는 영원히 폐하지 않고 점점 더 성장해서 장성한 분량이
될 때까지 열정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는 것이지요. 부활은 영생을
위해서 추구 되어야하는 진리의 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시는군요.
역시 사람은 함께 살아야 더 행복한 거 같습니다.
저는 아마도 진실한 마음의 평화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습니다.]
평화는 스스로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언제나 검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밀려들기나 하면, 파도가 부서지듯,
힘없이 늘 무너지기가 십상이고, 가끔은 인간적으로 이 연약함을 정을
두고 사랑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혹시나 하면 역시나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요,
바람 앞에 등잔불이요,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갈대가 아니었던가요.
언제나 최선을 하는 것만이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방법이지만, 결국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위로 받기 위한
자작극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곤 하지요. 문제 앞에 서서 손을 들고 포기하기 위한 모순적 자세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의 참모습
입니다.
그러면서도 새 날이 밝아오면, 또 다시 긍정의 마음이다, 힐링이다,
웰빙이다 하면서 모순적 자기도취에 자기를 내어놓고 마는 것이지요.
인간은 회귀의 본능이 있습니다.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가려는 모성에
대한 육체적 회귀 본능이지만, 우리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에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절대적 존재인 신적인 존재에 대한 회귀 본능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존재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든가, 애써 부인하다보면 결국
갈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면서 인생의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의 품으로 가기 전 까지는 혹은 진정한 영적 고향으로 가야할
당위성을 깨닫지 못하는 한 마음의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는 거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과 육은 늘 충돌한다는 사실입니다.
육과 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악연(惡緣)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육을 다스리는 악한 영이 먼저 인간을 사로잡아서 노예로
부리고 있기에, 선한 영에 대해 자기 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지요. 오늘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지요. 어떻게 하면 고해 같은 인생길을 청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간단한 결론으로 인도하였지요. 악한 영에서 탈출하는 겁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한 영을 향하여 냅다 지르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육적인 회귀 본능이 발목을
잡겠지요. 악한 영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최후 발악을 하겠지만,
난관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했고 죄지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을 회개하는 도구로 삼아서 통한하는 자가 되면서
점점 죄의 실체가 겉으로 드러납니다.
죄가 드러날수록 죄는 씻겨 내려가게 되고 그때부터 선한 영의 강력한
영향력을 점차로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연어가 대양을 가로질러
험난한 여정에 도전하는 것과 같이 영적 여정에 도전하는 겁니다.
악한 영의 시험과 난관을 이겨 내면서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시험을 이겨나가는 영적 도전이 전제 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가짜 평안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것이 전제 되는 한 우리는
영적 눈, 혜안을 가지게 되면서 제대로 진리를 향한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때부터는 평안을 찾는 대신에 오히려 영적 싸움에 임하는
군대 군사가 되는 것을 즐겨 반기게 됩니다.
평안은 악한 영을 대항해어 싸우는 선한 영의 군대장관이 될 때에
진정한 평안을 쟁취하는 겁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길 때 비로소
진리의 영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그 자유가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한답니다.
마치 우리가 진리라는 거대한 태양을 향해 여정을 하면, 태양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불순물 찌꺼기가 타서 점점 정제되어
가는 것과 같지요.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이미 진리의
여정 안에서 진리의 선한 영향력 안에 들어서 우리의 혼적 지정의와
상관없이 선하게 이끌림을 받는다는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정제된 순금 같은 신적 존재 가치가 덧 입혀지는 임계치까지
가게 되겠지요. 그 이후는 훈련되고 단련된 선한 모습으로 선한 영향력을
빛으로 소금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겠지요.
영적으로 회귀된 자신의 모습은 진리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고 함께 나누며
영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의 존재로 변한 인생, 거듭난
인생, 또한 부활의 새로운 세계를 누리는 겁니다. 영원한 참된 의와 희락과
평강의 세계입니다.
육을 완전히 떠나게 하는 동기는 먼저 육에 대한 완전한 이별이
전제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육 가운데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육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고뇌의 연속이겠지요.
그래서 가끔은 절대절망을 가지도록, 인간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도록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육의 인간세계에 다시 안주하고
적응하고자 하는 선택보다는 이 사건이 육을 떨치고 영으로의 여행을
선택하는 축복임을 깨닫고 육을 뛰쳐나오는 과감한 결단의 기회로 이용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