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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해와 진실(VII)

(1)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마태복음 5: 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 성화론은 이러한 구절들이 나올 때마다 아주 단순하게 그것을 인간들의 행위와 결부시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하곤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기독교는 알매니언 주의라 하고 로마서에서 의미를 알아볼수 있습니다.

<로마서 9: 15-16>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달음질해도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거죠. 예수님 말씀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라면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과 정확하게 지금 상반이 되는 내용이지요. 그러나 이 둘은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엘레이모네스’는 히브리어는 ‘라함과 헷세데’입니다.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레오스’로 번역이 되는데 슬픔, 애통, 자비, 은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건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함께 애통해 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긍휼이지요.

아브라함카이퍼는 ‘엘레오스’,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요소적인 성격(essential character)이라 했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우리가 국어사전에 있는 불쌍히 여김의 뜻만 갖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시편 62편 12>

“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인자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는 ‘헷세데’, 긍휼이에요. 자비, 긍휼, 은혜, 이것이 70인 역에서 ‘엘레오스’, 긍휼로 번역이 된겁니다. 그런데 “주께 속하였다”하고, 직역을 하면 “주님은 긍휼이시다”로 해석되지요. 주님을 대표하는 단어가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긍휼이신 주께서 행한 데로 갚으심이다”는 말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데로 갚으시는 것이 또 다른 속성인 ‘공의’이기 때문에 ‘긍휼’과 ‘공의’는 양날의 칼이라 하겠지요?

저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칭찬 받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긍휼이 나왔을 때 하나님이 찬송되어야 된다는 거지요. 성도에게서 나와야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폭로되는 그런 긍휼이어야 됩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요 복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고 성도가 되어서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을 설명해 주시는 거지요.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되는 셈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의 행함으로 보게 되면 이 구절은 다른 이들도 행할 수 있는 선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거죠.

그건 예수님을 때려 죽였던 바리새인들의 특기였어요. 그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기 자산을 다 팔아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들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일부러 일회에 두 번씩 금식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도와줄 여력이 없으면 밥을 굶어서라도 남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긍휼의 행위를 하나님은 쓰레기라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3장에 예수 사랑을 근거하지 않은 어떤 행위도 하나님은 nothing, 헛것이라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게 죄라는 거지요.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도 그게 믿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면 다 죄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집중적으로 설명한 책이 호세아서 입니다. 하나님 역할을 맡은 호세아라는 배우와 하나님 백성의 역할을 맡은 고멜이라는 창녀 이야기입니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해서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에게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호세아서 1: 6>

“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창녀 고멜과 호세아의 사이에서 딸이 출생이 되는데 그 이름이 ‘로루하마’, ‘아니다’는 뜻의 불변사로 호세와 고멜의 아이의 이름에 붙여서 “난 절대 너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거야”로 해석됩니다. 창녀 고멜의 자손이 하나같이 하나님 저주를 받는데 그게 창녀 고멜의 운명이기도 한 거지요.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아니다.’ 라는 부정사 ‘로’와 백성이라는 뜻의 ‘암미’가 조합되어 만들어져 “내 백성 아니야”의 뜻이 됩니다.

호세아서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조금 더 확실하게 그려져 있어요.

<호세아서 2: 2>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또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고멜의 이야기인데 저희라고 계속 패역한 창녀와 그의 자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절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은 흙의 상태인 우리의 처음 자리의 현실, 도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 죽은 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창녀가 하나님 신부가 되는 걸 구원이라고 하고 거기에 부어진 게 ‘라함’, 긍휼이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에 회복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호세아서 2: 23>

“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대주제입니다. 호세아서 11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근본인 긍휼이 잘 표시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서 11: 7-8>

“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이게 이스라엘이요, 고멜, 창녀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상태에서 긍휼을 부으시는 거예요)

8 에브라임이여(이게 이스라엘이죠.)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이게 하나님 긍휼이에요.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것이 긍휼이에요. 성경은 사랑, 인자, 자비, 자애, 인애 여러 가지 말로 번역을 하는데 그게 ‘라함’ ‘헷세데’ 지요. 그게 다 긍휼이에요. 그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고멜은 끝까지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단물 다 빨리고 노예 시장에 팔려 죽는 거지요. 그런데 호세아, 즉 예수가 은 15와 보리 한 호멜 반, 은 30을 가져가서 기어코 사오는 거지요. 이걸 긍휼이라고 해요.

<하박국 3: 2>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이라 번역이 된 단어는 ‘완전하게 살려내다.’ 라는 의미인데,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서 그들이 부흥케 된다는 거지요. 여기서 “부흥케 해주세요”라는 의미는 “나 죽여주세요”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이 기특한 일을 행해서 부어지는 게 아니라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게 된다는 거지요.

<미가서 7: 18-20>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여기서 인애가 긍휼이에요.)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긍휼은 우리가 강도 만난 자, 그래서 죄와 허물로 거반 죽은 자라는 걸 깨닫고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고백의 자리에 내려간 자들에게 부어지는 거지요. 나는 강도 만나 죽은 자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여 나를 도우소서하는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지요. 아무리 당신들이 행위를 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긍휼이 없었으면 그냥 푸줏간의 돼지고기일 뿐이니까 당신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는 없다 했습니다.

<로마서 3: 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율법사가 와서 나는 율법 다 지킵니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아는 율법의 이야기를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게 율법의 진의입니다.” 613가지 율법 조항이 사실은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걸 율법사가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거는 이미 기본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께 묻는게지요.

율법사가 지식으로는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그 진의는 몰랐던 것으로 율법사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은 셈입니다. 적어도 자기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은 거지요. 그러니까 내가 긍휼을 배풀 내 이웃을 가르쳐 달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은 너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가 아니야,네가 강도 만난 자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지요.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긍휼을 베풀 수 자, 은혜를 베풀 자,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폭로하시는 겁니다. 강도 만난 자가 죽은 몸으로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긍휼을 베풀거나 섬겨 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몸으로 누구를 긍휼히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져야 나는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지 내가 그런 것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절대 못된다는 걸 배우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서 영생에 이르는 자들인 사실, 성도가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하는 자기 부인의 고백입니다.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짜 긍휼이 나오는 거지요. 시간이 흘러가므로 해서 쌓아서 가질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어 ‘라함’ 은 원래 내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이라 믿었어서 내장이라는 단어를 긍휼, 인애, 자비, 사랑의 단어로 쓴 것으로 여러 가지 좋은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쓰인 것이지요.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장부 안에서는 내장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믿었지만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잠언 12: 10>

“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 놓는 것들의 실체는 다 잔인한 것이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 라함은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단어였고, 여자의 자궁에서 죄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했지요.

<시편 7편 14>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 거지요. 그래서 인간의 긍휼은 잔인이고, 하나님의 자궁에서만 진짜 긍휼이 흘러 나와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이 연결 되지 못하면 죽은 고깃덩어리죠. 어머니 탯줄이 연결이 되어 산자가 되는 거죠. 이걸 긍휼이라고 그럽니다. 어머니의 생명선이 끊어지면 그 태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긍휼은 우리가 강도 만난 자, 그래서 죄와 허물로 거반 죽은 자라는 걸 깨닫고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고백의 자리에 내려간 자들에게 부어지는 거지요. 나는 강도 만나 죽은 자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여 나를 도우소서하는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지요.

아무리 당신들이 훌륭한 행위를 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긍휼이 없었으면 그냥 푸줏간의 죽은 돼지고기일 뿐이니까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 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율법사가 와서 나는 율법 다 지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아는 율법 이야기를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게 율법의 진의입니다.” 613가지 율법 조항이 사실은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걸 율법사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다만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께 묻는게지요.

율법사가 지식으로는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진짜 진의는 몰랐던 것. 율법사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은 것으로, 내가 긍휼을 배풀 내 이웃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은 너는 긍휼을 베풀 자가 아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로 네가 강도 만난 자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지요. 주님은 비유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긍휼을 베풀 자, 은혜를 베풀 자,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폭로하시는 겁니다.

강도 만난 자가 죽은 몸으로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긍휼을 베풀거나 섬겨 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몸으로 누구를 긍휼히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는 겁니다.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져야 나는 살 수 있는 존재지 내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걸 배우면 되는 겁니다.

긍휼을 베풀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서 영생에 이르는 자들이라는 사실, 성도가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하는 자기 부인의 고백입니다.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짜 긍휼이 나오는 거지요.

긍휼이라는 히브리어 ‘라함’ 은 원래 내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이라 믿어서 긍휼, 인애, 자비, 사랑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지요.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내장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믿었지만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잠언 12: 10>

“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 놓는 것들의 실체는 다 잔인한 것이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 라함은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단어였고, 여자의 자궁에서 죄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했지요.

<시편 7편 14>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 거지요. 인간의 긍휼은 잔인이고, 하나님의 자궁에서만 진짜 긍휼이 흘러 나온다는 겁니다.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이 연결 되지 못하면 죽은 고깃덩어리지만 탯줄이 연결이 되면 산자가 되는 거지요. 이걸 긍휼이라 그럽니다.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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