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칠십줄에 정리한다는 것?
2023.07.18
“‘인생을 정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한 화두를 칠십을 넘긴 지금에 와서 다시 재정립해 보면, 젊은 시절 바쁘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소홀히 넘겼지만, 칠십의 넉넉한 나이의 인생에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다시 정리하며 찬찬히 되살려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나의 이야기, 깨달음의 이야기를 했지만, 요즘은 주로 유튜브를 통해서 과학, 역사, 철학, 여행 등에 관한 좋은 콘텐츠를 통해서 부족했던 과거를 재정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세상을 향한 바쁜 걸음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회한과 목마름을 한꺼번에 해결할듯 목마른 어린 사슴이 시냇가로 달려가듯 세상의 이야기를 흡입하고 있다. 어찌 이리도 달콤한지 거의 끼니를 잊어버리고 몰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시절 한 때, “인생은 클라이맥스를 경험하지 못하는 한 결코 만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향유한 적이 있었다. 누구도 인생의 옥망을 충족하지 못한 약간의 목마름만 있으도, 인간은 그로인한 좌불안석의 불안한 생을 평소에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인생 칠십, 이제 조용히 누어서 내평겨처졌던 그동안의 욕망의 파편들을 모아보고 새 마음으로, 천리도 한 걸음부터라는 낮아진 마음으로 새로이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본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쇼펜하우어와 헤겔과 니체, 그리고 부처와 넘어감의 반야심경, 도라 부를 때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노자와 그의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을 이어 받아 실천하고 전수한 장자, 공자(인의예)와 맹자(의)와 순자(예)와 제자백가, 화려한 말의 수사대신 끊임없는 질문으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아 내면의 성찰을 보게 했던 소크라테스 아르떼(탁월함)와 이를 이어 받은 플라톤의 이상향을 향한 국가론, 르네상스를 이끈 단테의 신곡과 도스토엽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지옥과 희망이라는 인간사를 정리하고, 거시세계를 아우르는 뉴톤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미세세계를 설명하는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 그리고 현실과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는 카오스 이론, 고대 애급문화와 헬라와 로마에서 히브리문화를 지나 그 동안 세계사에서 그 존재감을 잃어버린 오스만 대제국을 하나씩 둘씩 정리해 보면서 칠십평생 동안 비어 놓았던 인생 부분을 다시 정리해 채워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못 다녀왔던 세계의 구석구석을 짬짬이 틈이 나거나 정보를 받을 때마다 구글서핑을 통해 상세히 정리해서 필자의 네이버블로그를 완성시키고 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얼마나 다녀와 볼지는 미지수이지만, 세상을 하직할 그때까지 맡겨진 사명으로 알고 순간의 가치를 업수이 여기지 않고 창조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무리 여행이 좋다한들 노년에 세상을 다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는 가보겠다는 열정으로나마 구글서핑으로 정보를 모아가는 과정에서도 실제 몸으로 여행하는 것보다 더욱 새로운 여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발견했다는 사실, 이 또한 노년에 누리는 색다른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오래 전에 ‘인생은 만남이고 또한 정리’라는 생각을 피력하면서 만남과 정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밥먹으면 설거지가 필수인 것처럼, 때마다 미루지말고 때맞춘 인생의 설거지를 생각한 건지는 그 생각의 동기를 지금은 생각해 낼 수는 없습니다.
정리도 유행처럼, 나이와 시대에 따른 특징이 있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한 셈입니다. 나이 칠십이 주는 세상으로 부터의 자유함과 성숙함과 여유로움이 인생을 보는 관점이 새로이 정립되는 시기가 아닌가 여겨지는 것은 사물의 현상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이 옛날과 다르게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나이 칠십이 주는 경륜이라는 넉넉한 마음의 그릇이 용서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데 인색하지 않아졌기 때문이 아닌가도 여겨집니다.
마치, 할아비 할미들이 자식들과의 관계와는 달리, 손자와 손녀들과는 아름다운 소통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비유하겠지요? 손자 손녀들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하는 할비 할미들의 하해 같은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지요?”
♡도천 곽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