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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은혜를 저버리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귀한 그릇이 되어 거룩해지고, 주인에게 쓸모 있게 되며, 온갖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될 것입니다(If therefore anyone cleanses himself from these, he will be a vessel unto honor, sanctified, useful to the master, prepared unto every good work).”  <딤후 2:21>

디모데후서 2:21절은 현대에 사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깊이 적용되어야 하는 복음의 말씀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이 말씀을 상고하게 하는 것은, 조건문 if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소위 기독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세상 온갖 죄에 흽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깨끗이 하여 거룩한 그릇이 되면, 쓸모 있는 그릇으로 주인에게 쓰임 받을 것이고, 그에 합당한 온갖 선한 일이 예비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꿀 같은 교훈인가? 네가 무엇을 하면,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리라. 그래서 세상의 온갖 권서징악의 이론이 현대교회에서도 여과 없이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과 신약의 두 큰 줄거리도 분별 못한 채, 복음을 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무지의 소산이라고 한다. “내 백성이 무지해서 죽는구나?”하시는 하나님의 한탄이 지금 이시간에도 끊이지 않고 내뱉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한다. 오직 메시아 예수를 조명하기 위해 신약의 대비법으로 사용 된 것이 바로 구약이 아니겠는가? 

이는 로마서 8장 초입에 잘 묘사 되고 있다. 구약의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요, 신약에 나타나는 법은 이와는 다르게성령과 생명과 은혜의 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분의 은혜 아래 머무는 자들에게는 이유불문하고, 하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 되는 절대 권위를 위임 받게 되면, 더 이상의 정죄함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인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으시겠다는 의미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뜻 안에 있다고 하겠다. 주님의 전지전능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지도 모르지만, 이 죄인 됨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도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니겠는가? 

이 주어진 은혜는 거져 주어진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거저 주어졌다는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 대한 조건도 없이 주어졌다는 이야기이고, 이는 창세 전에 이미 계획 된 대로 이루어지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은혜 가운데 있는 백성들은 오직 회개하게 되어 있고, 회개하는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의 말씀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복음의 말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회개하고, 심령이 쥐어짜듯 가난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죄인 일 수 밖에 없고, 매일 먼지가 쌓이 듯, 죄를 짓고 살아야만 한다면, 이를 두고 어찌 우리가 천국의 백성인 양,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모든 성도들이야말로 위선자가 될 수 밖에 없지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매일 죄인 임을 자복해야하고, 우리의 위선을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 거울 앞에 서서 확인하면서 매일 죄인 임을 자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고뇌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 되는 점이다. 결국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로 가슴에 못이 박힌 멍든 자들로 살아 가야 한다. 이는 세상의 기쁨과도 전적으로 구별 되어져야 하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기쁨이기도 하다. 

세상 눈을 가지지 않고, 하늘의 눈이 주어졌기에 기쁨에 대한 관점도 달라졌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찾는 기쁨과 또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고난의 의미가 뒤바낀 것이 하늘의 고난이요 하늘의 기쁨이 된다는 역설적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온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의미를 깊이 그리고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죄인 중에 죄인인 탕자를, 그의 아버지는 기다리다 지치고 지친 모습으로 애타게 집 나간 탕자인 아들을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하고 늘 문밖을 주시하던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몰골이 남루한 아들을 단박에 알아 보고 신발도 신을 겨를도 없이 뛰어나가 아들을 덮썩 끌어 안으시지 않았는가? 

거기에는 오직 아버지의 조건 없는 긍휼함과 사랑이 있었지, 어디에도 조건적 반응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거룩해질 요소가 전혀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윽 능력 만이 우리를 진정한 구원의 반열로 인도할 수 있다. 우리가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 것인가?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 외에는 하나도 없다. 어쩌면, 그를 믿는 믿음 조차도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의 유전 인자 안에 성령의 인으로 꽉 박아서 피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구원에는 우리 의가 나서서 자랑할 공로는 하나도 없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 머물면서도, 탕자가 경험해야 하듯, 늘 안절부절 못하면서 죄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절대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주장해야 하는 그야말로 모순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들의 모순 된 논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로 물든 인간들과 어찌 함께 지낼 수 있을까?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이야기를 설명해야 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이를 두고, 한 가지 해결 점을 복음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해답이다. 하나님은 예수로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전적으로 구속하신 것이다. 그 구속의 근간에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일지라도 의롭다고 하실 명분을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로 사신 바가 되게 하셨다.

그의 보혈로 물들은 거룩한 의복으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온통 덮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빛으로 어둠을 덮으시듯이 우리의 죄를 거룩한 의복으로 덮으셔서 나타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 죄는 하나님이 보실 수 없도록 예수께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Come now, and let us reason together, saith the LORD: though your sins be as scarlet, they shall be as white as snow; though they be red like crimson, they shall be as wool).” <이사야 1:18>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한, 그분은 그분이 예비하신 거룩한 의복으로 우리의 죄를 덮어 감추이시고, 우리를 하나님 보좌 앞으로 인도해 나가게 해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일체 모른다 하시고, 우리 믿음대로만 심판하게 하시고, 생명책에 기록하신대로 영생을 선물로 주시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바울 사도와 제자인 요한를 통해서 서신서와 요한 계시록에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가 드리는 요지는 어쩌면, 공유한 내용을 반박하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교육이나 윤리적으로 아무리 뜻이 좋다고해도 진리는 아닙니다. 세상 문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제가 드리는 요지는 어쩌면, 세상 사회에서 책임감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은혜로 살라는 겁니다. 

즉 하늘 나라의 책임감은 세상에서는 무책임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세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하늘의 진정한 가치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자가 없다고 했지요. 어린 아이는 세상에서는 무가치하고, 어리석게 보여지겠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치라는 겁니다. 

은혜의 근본 취지를 이야기 드린 것이지요. 노력으로 책임감으로 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받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강요된 축복이 은혜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가치와 반대로 사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세상에서는 참혹한  극형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하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핍박 받고, 낮아진 자에게 우주를 다스리는 천국의 절대 권위를 부여합니다. 진리란, 하늘에서 부여 된 최고의 가치랍니다.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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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상의 몇 가지 허점 (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귀한 그릇이 되어 거룩해지고, 주인에게 쓸모 있게 되며, 온갖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될 것입니다.(딤후 2:21)

If therefore anyone cleanses himself from these, he will be a vessel unto honor, sanctified, useful to the master, prepared unto every good work.(2 Tim. 2:21)

이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을 보기로 하자. 우리가 말했듯이 게으름은 우리 성격의 하나의 큰 허점이다. 특히 젊은 형제 자매들이 여러분 자신 안에 부지런한 성격을 세우지 않으면 여러분의 봉사는 분명히 장래가 없다. 당신은 기껏해야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놓여 있는 신선한 한 송이 꽃에 불과하며 하나님 자녀 가운데서 공급하는 그릇이 되기가 어렵다. 당신이 십자가와 그리스도와 자신의 천연적인 것을 알지라도 당신에게 부지런한 성분이 부족하다면 그리스도를 남에게 주기가 어렵다. 당신의 게으름에 의해 그리스도가 완전히 상쇄되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만일 나를 믿지 않는다면 20 년이 지난 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성격 속에 근면이 결핍되어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일이 지연되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큰 일만을 하려 하고 작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성격의 하나의 허점이다. 자질구레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큰 일만 하려고 할 때 당신은 끝나게 된다. 주님 손에서 유용한 사람은 더 이상 클 수 없을 만큼 큰 일도 하고 더 이상 작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일도 한다. 모세의 율법이 이렇게 쓰여졌다. 자질구레한 일을 잘 해야 할 뿐 아니라 큰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성격 안에서 이러한 것도 처리해야 한다.만일 당신이 다만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만유를 포함한 죽음인 것만 전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생활에서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성격에 어떤 결핍이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에든지 소홀히 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성격도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는 것은 좋으나 일을 그냥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만일 어젯밤에 당신이 전한 메시지가 형편 없다면 당신은 자신을 용서하고 그냥 통과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서 자신을 정죄하고 그래서는 안 됨을 보아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진취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성격 안에 결핍된 사람도 주님 앞에서 쓸모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책임감이 없는데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천연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없다. 만일 그러한 사람에게 장로를 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책임감이 아주 적기 때문에 교회 안의 사람들이나 사물을 그에게 맡길 수 없다. 

어떤 일이든지 그에게 맡겨질 때 그냥 지나가고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는 그런 일을 닥치면 하고 닥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책임감의 결핍이다. 책임감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돕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사람들을 사랑하고 체휼할 뿐 아니라 또한 마땅히 주님 앞에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에게 교회 일이 맡겨질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일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그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 우리는 책임감을 갖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시간 관계상 더 많은 예를 들지 않겠다. 

당신이 자신에게 돌아와서 스스로 점검해 보면 오늘날까지 당신의 많은 성격들이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많은 성격들이 결핍되어 있는 당신 같은 사람은 당신의 성격을 바로잡기를 훈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의 쓰심에 합당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를 다스리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하기가 쉽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처음 구원받을 때 아직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은혜를 입어 성경을 추구하는 집회를 좋아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었다.

한번은 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는 자기의 성질과 성품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해고당한 뒤 나를 찾아와, 『당신은 ○○와 잘 아니까 실직한 나를 그에게 소개하여 전도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도하는 일과 교회를 봉사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쉽고 어떠한 성격이 갖춰질 필요가 없이 그냥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3 년 동안 전도의 일을 했던 사람이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수치라고 느껴진다.  오늘 아침 주님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다스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큰 것이며 이 일들에 있어서 사람의 합당한 성격이 요구됨을 보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일들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근면이 요구되며 진지함과 인내와 담대함과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자신을 한쪽에 제쳐놓는 것이 요구되고, 빈틈없음과 세밀한 것까지라도 고려하는 것이 요구되며, 하루하루 전진하게 하는 넘치는 진취성이 요구된다. 만일 형제 자매들에게 이러한 성격이 없다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여러분이 있든 없든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성격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 당신의 일상 생활에서 성격에 관한 것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주의하여 열심히 배워야 한다. 

당신의 옷을 아무 데나 두거나 책을 아무 데나 두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일정한 장소에 두어야 한다. 당신은 이런 정확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으로 하지 말라. 당신은 정확한 성격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모호한 말을 하지 말고 성경의 장절과 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 또한 당신은 자신의 책임감을 훈련해야 하고 책임감이 성격 안에 조성되게 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를 다스릴 때 어떤 일도 함부로 하지 않을 때가 되면 당신 안에 책임감이 이미 생긴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성격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바란다. (성격, 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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