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aleLife & Style

여자의 존재감이 사라진 시대!

“남자가 의미하는 여자는 여자의 존재감이지

여자가 아니다.” -K-스땅달-

“제가 존경하는 페친 곽교수님의 포스팅을 읽고 떠오른 상념입니다:

여자의 존재감이란 여자가 그곳에 있을때의 느낌이겠죠? 약간 다른 관점에서 낚시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언젠가 깊은밤에 바다 낚시를 갔었지요. 천둥이 치고 바람이 많이 불던 밤이였지요. 왠지 불안하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주는 황량함에 그만 철수를 할까 하다가 잠시 버티니 저쪽 어디선가 여자의 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남자들만 드문 드문 있던 황량한 갯바위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니 순간 황량함이 사라지고 그곳에 따뜻한 생기와 희망이 느껴지는 공간이 연출되더군요. 왜그럴까를 좀 생각해 보았는데 답을 얻진 못했어요.

그러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영화 혹성탈출의 작가는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지구 사회에서 인간들이 원숭이 취급받는 모습을 잘 묘사했지요. 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인간 여지와 남자를 말에 태워 추방하며 원숭이들끼리 나누던 대사였는데,

“인간들도 여자가 필요한가보군”

그러면서 영화에선 원숭이들끼리 킥킥대고 웃습니다. 돌이켜보면 남자들만 있었던 깊은밤 찬바람 불던 바닷가 갯바위의 낚시터에서 낭랑하게 들려온 여자의 웃음소리는 혹성탈출에서 무리 사회를 떠나는 남자 주인공 뒤에 타고 있던 여자의 존재감과 같은 의미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존재감이란 바로 생존과 번성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남자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황량한 들판에 고립되면 그건 유전자 차원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옆에 여자의 존재가 있으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한디는 유전자 치원의 1차 목표가 충족되는 희망찬 공간이란 것이지요. 생육과 번성이 보장되는 조건은 우리 인간의 감정에 알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를 부여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에 인간들은 아주 극악한 환경속에서 서로 이성을 찾고 생육하고 번성해온것 아닐까요?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지나칠 정도로 기피하는 현상이 시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전자 차원에서 절망이자 죽음을 의미합니다. 프랑스 곳곳을 깊숙히 한달간 다녀보니 여긴 어딜가도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가족 나들이의 모습을 보면 한가정에 3명 정도의 자녀가 일상적인것 같습니다. 국가가 돈아 많아 교육과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권대석님-

(1) 남자는 돈이 많이 생기면 더 많은 여자를 원하나 반대로 여자가 돈이 많이 생기면 더 이상 남자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2) 요즘, 변두리 아파트나 공원을 지나다보면 여자들이 반려견을 유아용 카트와 함께 개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흔하게 만나는 세상입니다.

(3) 중국에서만 만나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 요즘은 이 나라에서도 흔히 만나는 광경이지요? 여성 상위시대에 길거리에서 만나는 광경, 상식적이지 않게 여성이 남자를 언어나 물리적으로 과하게 폭력하는 장면들입니다.

(4) 여자란, 어리석거나 무지하거나 상식이 없거나 가혹하거나 표독스럽다.

(5) 과거에는 자녀 교육을 위하거나 부동산 투기에 치맛바람을 일으켰으나, 요즘은 선거철이나 정치계에 여자들이 묻지마 광풍으로 편을 가르고 나다니고 있지요.

(6) SNS 시대, 본의아니게, 있으나 마나한 상식 없는 여성들이나 오히려 흙탕물을 일으키면서 해되는 무모한 여성들이 미디어스에서 많이 만나게 됩니다.

(7) 그들은 이웃과 소통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 무례를 범하지요? SNS는 오로지 마구잡이로 설을 푸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8) 생육과 번성을 위한 여자들의 역할마저도 잊혀지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는 남자에게 여자란 로망이 아니라 그야말로 가혹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이 시대의 황량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9) 여자는 말하는 입은 있어도 듣는 귀가 없어서 논리적 추론도 소통을 위한 성의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세상 비극의 시작점이 된다.

결언:

사실, 남자가 바라는 여성의 존재감은 현실로 만나는 혐오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가지는 변하지 않는, 꿈꾸는 이상형의 여자가 아닐까요? 현실 로는 만나서는 안 되는 혐오스러운 여자의 실체들, 그러나 그리움으로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숙명적인 여자에 대한 존재감입니다.

“어머니가 깨어 일어날 때까지는 모든 집은 어둡다.”

여성의 존재감은 어머니를 향한 아름다웠던 그리움의 품입니다. 어쩌면, 아담에게 이브는 그의 뼈와 살이기 이전에 단지 숲 속에 거니는 요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자란, 실상으로서의 실체가 아닌

꿈 속에만 존재해야 하는 존재감은 아닐까요?

부언:

(1) 지금 21세기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기꺼이 여성들의 노예를 자처하는 것 같아요. 한국 남성의 중국화라고나 할까요? 직장 마누라고 퇴근하고는 곧장 시장 가서 장보고, 음식해 놓고 기다리는 지경입니다. 그동안 중국 여자들끼리는 마주 앉아서 마작을 즐기지요.

철 없는 어린 여자 애의 맥 없이 순종하는 노예라면 볼장 다본게 요즘 젊은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여자는 철이 없어도 대한의 어머니들이 보통입니까? 철 없어도 최고의 아이들로 육아를 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입지적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대한의 젊은 남자들은 아버지의 책무인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철 없는 여자의 노예가 되어도 끝 없이 인내하는 감사하는 남자가 되기로 작정한 셈이니다.

(2) 사회가 발달된 현대에 와서 인간은 성의 분별을 떠나 총체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복잡한 사회에 적자생존 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당하고 혹사 당하고 있습니다.

분주한 세월 속에서 방향을 잃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른 여성의 역할과 여권 신장은 괄목한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언제나 휴유증이라는 과도기를 지내야 하고 뜻하지 않은 희생과 부작용을 동반하지만 결국은 성숙이라는 선물을 받게 될겁니다.

격변의 20세기, 양대 세계대전과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여성의 노동을 유인하기 위한 여성의 노동역할을 시작으로 사회참여를 위한 선거권으로 인해 사회참여가 본격화된 셈이지만, 그 전에는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백인이 흑인들을 차별하는 수준으로 혹독한 차별을 감수했어야 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시대가 도래해서 여권의 위세에 남권은 더이상 논의의 대상에서 사라진지가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회의 주인된 현대의 여성들, 과연 준비된 여자들의 모습인가? 에 대한 고뇌가 시작되어야 할 적절한 때가아닌가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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