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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靈)이 인도하는 하늘사회를 이루자!

필자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주는 대량생산과 소비와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 주는 폐해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늘 사회주의 신앙공동체(信仰共同體), 사랑과 능력의 공동체를 꿈꾸어 왔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자기 자식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자식을 친한 지기에게 맡겨서 키우는 것과 같은 유(類)의 생활 지혜들을 현대에 접목해서, 현대의 병폐들을 하나씩 함께 풀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자식 간의 소통의 단절이나, 돈 있는 자식들의 빗나간 행동들이나, 재산 문제로 부모자식 간에 왕왕이 일어나는 비정한 사회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자식들은 사춘기(思春期)에 다다르면, 부자지간의 연을 끊게 하고, 국가가 일괄 맡아서 생활과 교육을 시키는 스파르타식 방법의 시행은 어쩔까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생 무상 급식 문제로 부자 부모, 가난한 부모를 나누어서 서로 정쟁의 희생자로 만드는 사회의 무지함에 더욱 이런 생각을 굳히는 것은, 사회에서 자식들을 네 자식, 내 자식으로 가르는 그 행태가 사회를 더욱 삭막하게 하고 황폐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모든 자식들은 국가의 소중한 인재로 동등하게 맡아서 양육하여 제대로 키운다면, 부자 부모나 가난한 부모 자식들로 인한 사회 폐회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 사회 화합과 단합이 더 잘 이루어 질것이리라.

부자는 그들의 소유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공익(公益)을 행하는 아름다운 국가에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미덕이 전 사회의 관습으로 자리 잡힐 것이다. 

백세시대(百歲時代)를 맞이해서, 새로운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자식들 끼리 서로 부모를 맡지 않겠다고 부모를 천대하는 등의 척박한 부조리 문화가 어느 사이 당연한 사회 가족 문화 풍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부부(夫婦) 자식 간의 인연(因緣)은 전생에 악연(惡緣)’이라고 그러지 않았는가?

자기 자식, 자기 소유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한, 평생 가족 일원 간에 발생하는 칼부림 현상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사회의 심각한 비극적 결과가 계속적으로 이어 갈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를 두고 한 가르침이 있다.

“내가 가정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가족 간에 칼을 주러 온 것은 일부러 가족을 깨러 온 것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서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근저(根底)에는 모든 것이 오직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으로 점철 되어 있다.

세상 사이비 종교에서는 이 소중한 하나님의 하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웃 사랑 보다도 먼저 자기 가족 사랑으로 내 새끼, 내 가족 중심으로 세속적인 화복(禍福) 사랑에 눈을 멀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무지(無知)의 연고(緣故)로, 사랑이 변질되고 왜곡된 나머지 사회는 점점 더 종말의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공산(共産)이다, 사회(社會)다 민주(民主)다하는 협소한 범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영과 육의 광의(廣義)의 해석으로 사회 종말적 문제를 바라보는 영적시야(靈的視野)를 가져야만 이 현실적 사회 문제를 바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국가와 사회와 온 국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협력하여 합리적이고 밸런스 있는 하늘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는 한, 늘 악순환의 폐해가 사회를 그늘지게 할 것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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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무상보육 이후, 어린이집 상황들이 개판 오분전일 거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육교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맞벌이 엄마들이 아니라, 그저 놀러 다니려는 엄마들이 아이를 맡겨놓고는 밤늦게 까지 술퍼먹고 애 안데려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가정을 해체해서 사회화하는 것은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임은 이미 혁명의 기본 노선으로 주장된 바 있다.

‘식탁의 사회화’로 일컬어 지는 무상급식과 어린이들을 국가가 보육해 사회주의 형 인간으로 개조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플랜이었다. 사회주의는 엄격한 이념의 통제속에서, 또 의식화된 혁명의 가치속에서 가족의 사회화를 추진하기 때문에 보육교사가 아이를 학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이념적 지향성이 없는 자본주의하에서 무상보육, 무상급식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무상보육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선함’을 추구하는 종교적 미션을 가진 교회나 사찰,성당과 같은 기관만이 가능하다. 교회의 목사, 성당의 신부, 사찰의 주지와 같은 이들이 책임자가 되어 믿음과 소명의식이 있는 이들을 선발해 보육을 맡기게 하고, 그들과 함께 신앙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정신적, 윤리적, 공동체적 유대를 가져야 그나마 열악한 보육환경에서 아동학대와 같은 행위를 막을 수 있다.

사회주의 방식의 저렴한 무상보육 배급시스템에서 어린이집 원장이 보육교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나? 사회는 공식적 제도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공식적 제도가 마치 바닷물에 잠긴 빙산처럼 더 크다.
그런 것이 관습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 한정석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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