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빈손?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것이 있다면, 아담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가정을 이루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라면, 번듯하게 자리 잡은 집이야 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주택이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지는 몰라도, 대신에 얄팍한 상혼에 휘말려 부동산이란 이름으로, 도매금으로 취급 당하고 있는 것도 현실의 모습이다. 이제 결혼도 사랑 대신, 집이라고 하는 물질적 가치를 따지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가정의 보금자리의 참된 의미 보다는 장래의 일신을 보장하는 육신의 보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제는 이 보다 더 영악해져서, 부동산으로의 집의 가치 보다, 동산으로서의 현금과 환금성의 가치를 더 추구하는 신세대의 등장으로, 집을 마치 무거운 짐처럼 여기는 풍조가 성횡해서, 집을 사기 보다는 전세로 월세로 해서 영원한 보금 자리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게 되었다.
대학을 지칭하는 상아탑이라는 말도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듯이, 이제는 가정과 보금자리라는 스위트 홈의 대명사도 저 언덕으로 사라져 갈 날이 머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가난한 그 시절에는, 부르는 게 사랑 타령이었고, 아니면 집 타령이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라고 부른 남진씨의 노래로 부터, 스위트홈을 부른 가수가 어디 한 둘인가? 그만큼, 당시에는 부족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주택 난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코딱지 만한 방에 열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한 방에 둥굴며 기거하였으니, 누군들 번듯한 집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집=가정=스위트 홈=행복 이라는 일차원적 공식을 우상처럼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그리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고 산 것 아니었는가? 결국은 집이 우상이 되었고, 모든 희생을 바쳐서 집을 장만 했지만, 기실은 집 안에 오손 도손 마주 앉아 있어야 할 파랑새는 다른 세상 가치를 찾아서 이미 딴 곳으로 훨훨 날아간 뒤다.
문제는 집이 아니라, 세대 간의, 이성 간의 각 자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모두 하나같이 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홈 스위트 홈을 추구하는 철학 마저도 다 다르지 않은가? 그러면 어떡하란 말인가? 당장 집을 팔아, 뿔뿔이 나누어서 떠나는 거다. 이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가정을 깨어야만 하는 모순의 시대를 사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인생은 해답도 방향도 지침도 없이 그저 표류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전세 값이 극성을 부릴 수록 부용의 뿌리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냥 유목민의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는 거다. 이를 지식인들은 21 C 노마드 시대라고 부추기고 있다.
“성을 쌓고 안주하는 자는 망한다. 떠나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현대의 많은 젊은 이들의 행세가 어찌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풍조를 조금이라도 간직할 수 있겠는가? 또 떠나라고는 하지만,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어차피 떠나 갈 것, 또 무엇을 준비 하겠는가?하는 방관적 태도만 눈덩이처럼 키우고 있다.
누가 예전에 ‘인생은 영원한 나그네 길’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온 정열과 인생을 바쳐서 보금자리를 마련 하려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붕어 빵집에도 붕어가 없고, 보금자리에도 참된 행복도 가정도 없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 오늘 따라, 최희준 씨의 구수한 목소리가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