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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순수성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은 흙의 티끌이라고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연합해져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땅의 흙과 하늘의 영이 합해져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중재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부여 받은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도 아니요, 동물도 아닌 애매하고 역설적이며, 모순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서는 동물의 속물적인 근성과 더불어 신의 신성한 속성까지도 겸비한 신의 특별한 창조목적을 위해 지어진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성을 부여 받은 존재이기도 해서, 신의 창조 의도에 따라서 각 자는 지킬과 하이드의 역할로 구별되어 살아가게 된다. 땅에 뿌리를 박고, 땅의 역할을 충실히 하든지, 비록 땅에 뿌리를 박고는 있지만, 땅의 소산이 아니라, 하늘의 소산인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땅의 육과 하늘의 영이 합작해서 인간의 고유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혼이라는 그릇의 모습으로 빚으져서 인간의 개성을 나타내게 된다. 그 혼의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땅의 허상과 하늘의 실상을 담는 그릇으로 구별 되어 평가되게 된다. 혼은 마치 저울과 같아서 무엇을 많이 담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땅으로 기울고, 때로는 하늘의 뜻으로 기울게 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숙명적 운명이 된다. 

인간의 순수성은 하나님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그릇 안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순수한 첫 영을 담는 것이다. 비록 흙이라는 땅의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그릇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을 담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인간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겠고, 우리는 인간의 연합된 속성인 혼이 하나님의 영으로 온전하게 거듭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의 순수성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인간이 되돌아 가서 자리 잡는 것이고,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역할을 구별하여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창조주의 능력을 신뢰하고 창조주의 의도에 충실히 순종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창조 목적에 벗어난 어떠한 행위도 인간의 순수성을 벗어난 교만한 짓거리라고 정의 된다. 순수성이란, 순전히 창조주 앞에 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낮아지는 피조물을 창조주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지표가 되어야 한다. 인간 순수성의 진정한 의미는 피조물이 자신의 주제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고, 이를 깨달음이나 믿음이라는 거창한 용어로 표현 되기도 하지만, 기실은 피조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전제를 두었을 때, 이 모든 것이 창조주로 부터 이루어졌다는 근본 의미를 받아 들며지게 되며, 이를 은혜나 섭리론으로 귀결되게 된다.

성경의 욥의 고백대로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가져 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다”는 깨달음이 인간의 순수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가 되는 것이라 생각 된다. 순수성은 성화라는 기독교 용어로도 표현 되는 데, 성화도 인간이 스스로 애써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창조주의 계획대로, 그분의 뜻대로 정하사, 그분의 은혜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흙의 티끌로 만들어진 피조물인 관계로 스스로는 어떠한 행위로도 순수성을 회복할 도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질 뿐이다. 극단적인 인간의 순수성이란 결국은 성화를 거쳐서 영화 되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 육의 뿌리를 짜르고 자유의 날개를 달고 하늘 저편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육의 티끌의 모습을 부시고  온전한 영을 담아 연합하여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마크 트윈이 “20년을 뒤돌아 볼 때, 한 일 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회한이 남을 뿐이다. 항구에 정박한 배는 그 묶인 끈을 풀고  대해로 나아가야 한다. 뛰쳐 나가 새로운 세계로 도전하라”고 했다. 인간의 방황하는 노마드(Nomad) 근성은 원시 시대의 인류 생존의 수렵문화의 유전자로부터 유래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원천적인 요인은 아마도 죄로 인해 생존을 위협 받는 두려움으로 부터 유래된 보호 본능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이 말의 의미는 왜곡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분주한 행위적 발걸음은 왜곡된 인간성으로 인한 두려운 마음에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곡된 인생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고, 이를 순수성이라고 이를 수 있다. 순수하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불안한 나머지 행위적 업적을 쌓기 위해 정신없이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황하는 인간의 본질은 죄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필자도 젊은 시절 한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았다. “노느니 염불한다”는 핑계로 닥치는 대로 몸으로 부딛치면서 살았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서 세상 좋은 곳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경험한답시고 분주하게 쑤시고 다녔다. 딱히 이렇게 분주하게 다닌 이유를 설명할 꺼리는 없다. 행동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죽자살자하고 인간이 세워 놓은 가치 기준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넓혀 나간 것 뿐이다. 이것도 야생 동물이 자기들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한 생존의 보호 본능과 유사한 현상이다. 이도 왜곡 된 인간 본성으로 부터 오는 순수하지 못한 이유로부터 귀결되는 현상이다.

이제 이순을 넘기고 고희로 가는 필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틀은 더 이상 그 의미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방황을 끝내는 시점에 다달았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생존의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구속 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순수함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필자의 간절한 느낌이다. 

시편 23 편에 방황을 끝내고 이 순수함 경지에 들어 간 

다윗의 고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잠잠히 그를 기다리며, 

평생에 그의 전에 머무리로다! “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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